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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서유기 모험의 시작,리뷰 (가오리 요괴, 대자대비, 데우스 익스 마키나)

by talk79536 2026. 6. 30.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주성치가 배우로 나오지 않는 서유기 영화가 제대로 된 서유기일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습니다. 대학 영상예술학회에서 홍콩 영화 상영회를 준비하며 스크린 앞에 앉았을 때, 그 의심은 오프닝 5분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서유항마편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의 영화였습니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거대 가오리 요괴와 예비 불제자의 첫 싸움

혹시 이 영화의 오프닝을 보고 당황하셨던 분 계십니까? 저는 학회실에서 처음 이 장면을 보다가 실제로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평화로운 강가 마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가오리가 수면 아래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장면은 공포 영화의 오프닝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직 머리도 깎지 않은 예비 불제자 진현장이 아기를 구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뛰어드는 그 긴박한 소동극은, 주성치 특유의 슬랩스틱(slapstick)과 결합하면서 웃음과 공포가 동시에 쏟아지는 기묘한 장르적 혼합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슬랩스틱이란 과장된 몸짓과 황당한 상황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연출 기법으로, 주성치가 배우 시절부터 특기로 삼아 온 방식입니다.

진현장의 퇴마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인 동요삼백수, 즉 동요 삼백 편을 외워 요괴 스스로 선한 본성을 깨우치게 만드는 방식인데, 현실적으로는 요괴를 더 분노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습니다. 여기서 동요삼백수란 폭력이 아닌 교화(敎化)를 통해 악을 정화하려는 불교적 구제 철학을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제가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다소 유치하다고 느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이 설정이 왜 필요했는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영화의 강점과 약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슬랩스틱과 공포의 혼합이 주는 독특한 장르적 쾌감
  • 요괴를 교화하려는 불제자의 순진한 이상과 냉혹한 현실의 충돌
  • 무고한 마을 주민들의 희생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과도한 고어(gore) 연출
  • 프로 퇴마사 단소저의 등장으로 두 인물의 기묘한 인연이 시작되는 구도 설정

홍콩 영화의 장르적 혼합 전략은 학술적으로도 주목받는 주제입니다. 홍콩 영화 산업이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와의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코미디, 무협, 호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장르를 발전시켜 왔다는 분석은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대자대비의 미학, 그리고 저팔계와 손오공

이 영화에서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사랑이 종교적 각성의 방화쇠가 될 수 있을까요?

저팔계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중간 축을 담당합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미남의 외모를 가졌지만, 물광 피부가 벗겨지자 추악한 멧돼지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그 장면에서 학회실 안이 한 번에 폭소와 비명으로 들끓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저팔계의 추악한 비주얼은 단순한 B급 괴기 연출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원한이 응고된 결과물이라는 서사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오공.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는 칭호 그대로, 봉인에서 풀려난 손오공의 등장은 영화의 톤을 완전히 뒤바꿉니다. 여기서 제천대성이란 하늘과 동등한 권능을 주장하며 천상계에 반기를 들었던 원숭이의 왕, 손오공의 칭호로, 그의 포악성과 오만함을 압축하는 표현입니다. 호랑이 기운을 부리는 퇴마사들, 검기(劍氣)의 신이라 불리는 공공자까지 손오공 앞에서는 벌레보다 약합니다. 검기란 도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氣)의 파동으로, 고수들이 칼날을 직접 대지 않고도 적을 베는 무협 장르의 핵심 개념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단소저가 온몸이 부서져 가면서도 현장에게 장난스럽게 다가오던 장면은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밤늦게 학회실 문을 잠그고 캠퍼스를 홀로 걷던 그날 밤, 삭막한 바위틈에 피어난 연꽃 한 송이라는 영화 속 이미지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단소저가 갈기갈기 찢어 아무렇게나 이어 붙인 동요집이 사실은 여래를 소환하는 불경이었다는 반전 설정은, 소아적 사랑이 대아적 자비로 승화된다는 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시적으로 압축하는 장치였습니다. 여기서 대자대비(大慈大悲)란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자비심으로, 나 자신이 아니라 일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무한한 연민을 뜻합니다.

영화와 종교적 각성의 관계는 문화 콘텐츠 연구에서도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영화가 관객의 감정적 경험을 통해 윤리적·종교적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은 문화심리학의 핵심 연구 주제이기도 합니다.

데우스 익스 마키나의 한계, 그럼에도 걸작인 이유

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께 조심스럽게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결말을 보며 뭔가 너무 편하게 해결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솔직히 후반부 전개에서 명확한 구조적 한계를 느꼈습니다. 손오공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모든 퇴마사가 무너지는 절망적인 순간, 단소저가 이어 붙인 동요집이 여래를 소환하는 불경으로 기능하면서 우주적 부처가 등장해 상황을 일거에 뒤집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데우스 익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서술 방식입니다. 데우스 익스 마키나란 인물들의 자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를 초자연적 존재나 갑작스러운 외부 요인이 개입해 해소하는 플롯 기법으로, 극적 긴장의 해소가 너무 편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구조입니다.

현장이 평생 쌓아 올린 내적 성장이 단소저의 죽음이라는 신파적 충격 하나로 급격히 완성된다는 점, 공공자를 비롯한 개성 넘치는 퇴마사들이 손오공의 악인성을 부각하기 위한 소모적 제물로 퇴장한다는 점은 제 경험상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오프닝의 유쾌한 소동극과 후반부의 종교적 비장미 사이에서 장르적 균열이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 채 결말로 치달리는 인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 주성치 없이도 메가폰 하나만으로 이 서사를 완성해 낸 장인 정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오공의 머리에 긴고아(緊箍兒)가 씌워지는 장면,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며 현장의 제자가 되는 장면은,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본 날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여기서 긴고아란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는 머리띠로, 그의 자유분방한 폭력성을 억제하고 수행의 길로 이끄는 계율의 상징입니다.

결말에서 서역을 향해 떠나는 네 스승과 제자의 실루엣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고 나면, 이 모든 소동과 슬픔이 결국 중생을 구하기 위한 장대한 여정의 서막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 날 밤 캠퍼스에서 혼자 걸으며 느꼈던 아련한 청춘의 방황이, 어쩌면 저에게도 작은 구도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잔혹한 고어 연출의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한 번쯤 정주행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참고: https://youtu.be/-xxs6z3Lhog?si=sF_mLJExC7cYex7P